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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자가 본 문학·예술인②] 도스토옙스키, 소설에 자신의 간질 증상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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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9-04-18
조선일보

[신경과학자가 본 문학·예술인②] 도스토옙스키, 소설에 자신의 간질 증상 재현

기사입력 2009-04-15 09:16 기사원문보기
신경과학자가 본 문학·예술인 ②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중얼거리며 손발 떨어 아버지 사망 후 더 악화 '측두엽 간질' 때문인 듯


학회 참석을 위해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찾았던 11월,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었지만, 네프스키 대로를 걸어 그 유명한 카잔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성모 사진 앞에서 중얼중얼거리며 기도하거나 입맞춤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100여 년 전 간절히 기도를 드리곤 했던 도스토옙스키 부부를 떠올렸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의사였던 아버지가 근무하는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7남매의 두 번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잠깐 환청 증세가 있었고 어머니가 사망한 뒤 잠시 말을 못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평생 따라 다닌 것은 간질이었다. 환청 경험이나 잠시 말을 못한 것이 간질 때문이란 주장도 있으나, 심약한 아이의 신경쇠약으로 인한 일시적인 증상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가장 확실한 간질 발작은 184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나타났고, 이후 평생 동안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도스토옙스키의 친구이자 의사였던 쟈노우스키의 기록에 의하면 얼굴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지고 눈동자에 공포가 스친 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라고 중얼거리며 손발을 떨었다고 한다.

몸을 떨기 전에 이런저런 감정 변화를 보이기도 했는데, 예컨대 환희의 감정을 경험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증세라면 인생의 어떤 기쁨이 있더라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와 같이 '행복한 발작' 보다는 공포나 슬픔을 느낀 뒤 전신 간질발작을 일으킨 적이 더 많았다.

이런 증상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측두엽 간질'을 앓은 듯하다. 측두엽의 안쪽은 뇌의 감정 회로를 이루는 '변연계'의 일부다. 특히 이곳에는 '편도체'라 불리는 호두알 만한 구조물이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실험적으로 이곳을 전기로 자극하면 심한 공포, 우울 같은 증상을 경험한다. 따라서 측두엽 간질이 있는 사람은 이 부근의 신경세포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서 간질에 따른 여러 증상이 유발되곤 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증상이 아버지의 죽음, 시베리아 유배, 혹은 빚에 쪼들릴 때 심해졌던 점으로 미루어 진짜 간질이 아니라 가성 간질(뇌 이상이 아닌 정신적인 갈등에 의한 발작 증상)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각종 기록을 종합하면 그는 진짜 간질을 앓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가 경험한 대표적인 간질 증상은 발작 직전의 환희, 환각 상태, 피할 수 없는 괴로운 상념에 사로잡히는 것 등인데, 이런 증상들은 그의 소설 '백치'의 미슈킨 공작에게서 완벽하게 재현돼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간질 외에 우울증과 도박 중독에도 시달렸다. 도박으로 돈을 날리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릴 때마다 아내 안나와 함께 카잔성당의 성모상 앞에서 이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했던, 힘없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빚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원고를 썼다. 그 덕택에 우리는 그가 남긴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향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김종성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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